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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

나그네로 산 80년


- 원이삼 선교사님의 80회 생신을 축하드리며


양승훈


원이삼(Wesley Wentworth) 선교사님은 여러 해 전에 별세하신 대천덕(Reuben Archer TorreyIII) 신부님과 더불어 필자가 스스로 멘토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선교사님은 30세였던 1965년에 한국에 오셔서 지난 50년간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대학원생들이나 젊은 교수들을 찾아다니시면서 기독교적 학문연구, 기독교 교육, 기독교 세계관 관련 문헌들을 보급하고 공부하도록 격려하는 사역을 하셨다. 선교사님이 그 사역을 하신지 어언 반 세기가 되었고, 서른의 청년은 팔십의 노인이 되셨다.


그리고 35년이 지났다. 그 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한 평의 땅도, 한 칸의 방도, 사무실도 없이 사신 선교사님의 삶은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독교 학문 운동, 기독교 교육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일을 위해 선교사님은 인생을 드려 커다란 그물을 치셨고, 그 그물에 걸려들었던 많은 “물고기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바로 필자이기도 하다.

1. “지근덕 은사”

필자가 선교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으로 기억된다. 정확하게 어떤 맥락에서 만났는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선교사님이 필자가 공부하던 KAIST를 방문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선교사님을 자주 뵙게 된 것은 그 다음해부터 시작된 창조과학 관련 모임에서였다. 1980년 8월, ‘80 세계복음화대성회 위성 컨퍼런스로 CCC 정동채플에서 “창조냐, 진화냐”란 주제로 나흘 동안 특별 창조과학 세미나가 열렸던 것을 계기로 한국창조과학회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대학원 학생이었던 필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선교사님은 준비위원회가 열릴 때면 늘 오셔서 이런 저런 영어 자료들을 배부해주셨다. 1981년 1월, 드디어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한국창조과학회 창립총회가 열렸고, 이어 많은 창조과학 강연이 곳곳에서 열렸다. 선교사님은 창조과학회 관련 집회가 열릴 때마다 오셔서 집회장 입구에서 영어책들을 전시해 놓으시고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면서 보급, 판매하셨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나 늘 집회 장소 입구나 로비에 테이블을 놓으시고 책을 팔았다. 그래서 필자는 처음에는 선교사님을 책을 판매하는 사람으로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교사님을 단순한 책장사로만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선교사님은 책을 팔러 오셨는데도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책이 너무 많았다. 책장사를 해서 돈을 벌려면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할 텐데 선교사님은 책을 파는 것보다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데 훨씬 더 큰 열정이 있었다. 선교사님은 사람들이 책을 사는 것과는 무관하게 늘 좋은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소개해주셨다. 실컷 설명하신 후에 상대가 책을 사지 않아도 별로 섭섭해 하지 않으셨고, 때로는 책을 그냥 주기도 하셨다. 선교사님은 책만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었다. 책과 더불어 영어 논문이나 기사 등을 복사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셨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복사비가 지금처럼 싸지 않았는데도 선교사님은 부지런히 논문들을 복사해서 배포하셨다. 누가 복사비용을 부담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복사비도 받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교사님은 필자를 만날 때도 늘 영어로 된 책이나 논문, 소책자 등을 주셨다. 자꾸만 공짜로 문헌을 받는 것이 죄송해서 일부는 돈을 지불했지만 그냥 받은 문헌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당시 필자는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쏟아져 나오는 전공분야 논문들도 다 읽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님이 주는 문헌들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물론 실제적인 시간 여유도 없었다. 또한 솔직히 선교사님이 주시는 세계관 관련 자료들에 대해 큰 관심도 없었다. 필자는 그 때까지 학문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님은 만날 때마다 필자에게 좋은 문헌이라면서 영어 문헌들을 자꾸만 주셨다. 한국어 문헌이라 해도 잘 읽지 않았을 텐데 전공과 무관한 영어 문헌들은 더더욱 읽혀지지가않았다. 선교사님은 필자가 바빠서 읽어보지 못했다고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읽지 못했다고 해도 별로 언짢아하지도 않으시면서 또 새로운 문헌을 주셨다.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이어서 한국인들의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를 빨리 알아채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고, 선교사님 특유의 “지근덕 은사” 때문이기도 했을 테지만 하여튼 선교사님은 정말 집요하셨다. 선교사님은 학교 내 기독교 관련 행사나 캠퍼스 채플이었던 과학원교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캠퍼스를 방문하셨고, 그 때마다 늘 기독교 세계관 혹은 필자의 전공인 물리학과 신앙의 관계를 다룬 새로운 문헌들을 끊임없이 주셨다. 선교사님은 필자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도 지치지 않으시고 많은 영어 책과 문헌들을 주셨다. 하지만 읽지도 않고 책상머리에 쌓여만 가는 문헌들을 바라보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선교사님을 만날 때마다 아직 못 읽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죄송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복사비나 영어 원서 책값이 싸지도 않았지만 선교사님은 늘 가방에 논문이나 책을 갖고 와서 필자를 미안하게, 그리고 힘들게 하셨다. 그냥 주시겠다는 것을 안 받겠다고 할 수도 없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필자는 그것이 선교사님의 치밀한 전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미안한 마음이 쌓이게 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읽게 될 것이고, 한 번 제대로 읽어서 “낚시에 걸리기만” 하면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2. “소책자 회심”

요리조리 피하던 필자가 선교사님의 낚시에 확실하게 걸린 것은 1982년 12월 16일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필자가 그날을 잊지 않는 것은 바로 그날이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님은 꽤 떨어진 곳에 사셨는데(당시 광화문이나 서대문 쪽에 기거하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귀신처럼 아시고 바로 그날 논문심사가 끝난 직후 홍릉에 있는 학교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늘 그러하셨던 것처럼 또 낡은 가죽 가방에서 논문과 책들을 끄집어내서 주셨다. 늘 그러하셨던 것처럼 꼭 읽어보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논문심사가 끝났으니 더 이상 핑계거리가 없을거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신 것 같았다. 필자 역시 이제는 시간이 없다고 둘러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선교사님이 공짜로 주신 많은 문헌들에 대해 최소한의 은혜라도 갚을 요량으로 꼭 읽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영어 문헌들이라 혼자 읽기는 부담스러워서 몇몇 과학원교회 후배들을 모아서 학교 강의실에서 연구회를 시작하였다. 처음에 읽은 책은 네덜란드 과학사가인 리센(Hendrik van Riessen, 1911-2000) 교수가 1966년에 쓴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The Christian Approach to Science)이라는 얇은 영어 소책자였다. 원래 역사가들의 글이 어렵지 않은 탓도 있었고, 리센 교수님 자신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용 중에 영어 저자들의 정교하고 어려운 표현들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생소한 단어들이 꽤 있어서 차근차근 사전을 찾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필자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그 소책자를 읽기 시작했지만 글을 읽어가면서 마치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소위 “소책자 회심”을 경험했다. 그 때까지 과학에 대해 필자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필자는 그 때까지 그냥 전공인 반도체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하며, 주일에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필자의 전공 공부와 예수 믿는 것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자를 읽으면서 필자는 과학자로서 새로운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리센은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허구에 대해 맹렬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은연 중에 과학은 가치중립적이고 아무런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가정해왔던, 아니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과학을 공부해 왔던 필자가 얼마나 단순하고 어리석었는지를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그의 글을 통해 과학이라는 것, 과학적 활동이라는 것이 필자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중립적인 활동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작은 책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알게 되었고, 필자가 공부한 과학을 성경적인 안목으로 조망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 과학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기독 과학자의 기본적인 소명임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연구회를 인도하면서, 그리고 그 동안 선교사님이 주셨던 문헌들을 차근차근 읽어가면서 필자는 새로운 열정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필자가 선교사님과 늘 좋은 관계만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언젠가 선교사님이 끊임없이 서구학자들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했을 때 필자가 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그 따위 서구의 시들어빠진 지성을 가지고 우리들을 설득시키려 하지 말라”고... 아마 필자의 영어실력이 부족해서 약간의 민족주의적인 느낌이 다 전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있지만 선교사님은 적어도 겉으로는 별로 서운해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당분간 “쉰” 후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문서 전달 사역을 시작하셨다. 선교사님은 지식인들을 설득시키는 겸손과 인내가 있는 분이었다.

3. 기독교적 학문과 교육

1982년 연말의 “소책자 회심”은 단순히 기독교적 학문과 교육에 대한 열정에만 머물러 있지않았다. 선교사님과 자주 만나면서 기독교적인 학문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몇몇 과학원교회 친구들과 더불어 나누었던 새로운 기독교 대학에 대한 막연한 생각도 좀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독교 대학에 대한 비전은 1981년 3월 마지막 토요일, 과학원교회의 신입생 환영 주말 수련회에서 태동되었다. 해마다 새 학년도가 시작되고, 신입생들이 입학하는 3월에는 과학원교회 주최로 주말에 서울에서 멀지 않은 수양관에 가서 주말 기도회 겸 신입생 환영회를 하곤 했다. 그 해는 과학원교회를 돕던 권봉태 목사님(별세)의 배려로 권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금화제일교회 미니버스를 빌려 타고 일산에 있는 아멘기도원으로 수련회를 갔었다. 늦은 밤까지 진행된 기도회에서는 다양한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했다. 그 때 나눈 여러 기도제목들 중에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과학원에서 만나게 하시고 공부하게 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제목도 있었다. 아직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인데 국가가 모든 재학생들에게 군복무를 면제시켜주고(당시에는 모든 KAIST 학생들은 현역 입대를 면제받았음), 등록금 전액 면제에 더하여 엄청난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한 데는 과학입국, 산업입국 이상의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출발한 기도 제목이었다.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는 새로운 대학의 설립에 대한 비전이었고, 이를 위해 현재의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의 전신인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라는 것이 탄생하였다. 그 때의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 후에 CUP에서 출간된 필자의<새로운 대학>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대학에 대한 비전을 두고 기도하고, 이를 위해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라는, 촌스럽고 어색한 이름의 단체를 시작했지만 구체적으로 그런 대학이라면 어떤 대학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아이디어가 없었다. 하드웨어에 대한 생각만 있었지 그 하드웨어를 채울 소프트웨어에 대해서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이 “빈” 아이디어를 채운 분이 바로 선교사님이었다. 선교사님은 기독교 대학이라는 하드웨어를 갖춘 대학에 대한 비전은 없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연구와 교육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계셨다. 우리는 선교사님을 통해 기독교 대학이란 학문과 교육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조망을 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님은 그 때까지 필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다른 여러 대학원생들이나 젊은 교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이와 관련된 책이나 논문 등을 꾸준히 배포하셨다. 필자를 포함해서 국내외 일반 대학이나 기독교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많은 기독학자들, 그 중에서도 기독교 세계관이나 기독교적 학문이나 교육에 열정을 가진 학자들은 대부분 그런 선교사님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인내의 열매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선교사님의 헌신은 다만 국내에 있는 젊은 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선교사님은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특히 북미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많은 한국 학생들이나 교수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적 연구와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셨다. 안식년이라고 미국에 돌아가셨을 때도 선교사님은 미국의 여러 주요한 대학을 돌아다니시면서, 혹은 코스타와 같은 기독학생들의 선교대회에 참석하시면서 한국 학생들과 학자들을 설득하셨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학문을 하라고... 어떤 의미에서 선교사님에게 안식년이란 한국에서 하시던 사역을 미국으로 잠시 옮긴 것에 불과했다.

4. 나그네의 삶

선교사님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이나 교수들 뿐 아니라 잠시 객원학자로 미국에 머무는 사람들도 그냥 놔두지 않으셨다. 필자는 1983년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곧 바로 모교인 경북대 사대에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1986년 초에 시카고대학에 객원학자로 간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미국에 갔기 때문에 영어도 서툴렀을 뿐 아니라 생활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교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몇 주일 후에 피츠버그에서 쥬빌리 컨퍼런스라는 큰 선교대회가 열리는데 꼭 참석하라고 하셨다. 주강사가 토니 캄폴로(Anthony Campolo)라는 분인데 아주 훌륭한 분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북미주에 있는 훌륭한 기독학자들을 여럿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본인도 그 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라면서 꼭 참석하기를 당부했다. 사실 필자는 그 때까지 피츠버그가 미국 동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선교사님이 좋은 모임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게다가 멀리 한국에서 선교사님도 오신다고 하기에 어떨 결에 참석해 보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미국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아차 대답을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츠버스는 필자가 거주하던 시카고 인근 위튼에서는 800km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게다가 미국에 도착한지 불과 몇 주 밖에 안 된 촌사람이 엄청 춥고 눈이 많이 오는 2월에 작은 4기통 중고차로 피츠버그를 다녀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참석하겠노라고 대답은 했고, 갈려니 너무 부담스럽고, 급하게 비행기를 타려니 돈이 많이 들고... 내색은 못하고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선교사님은 먼 곳에서 필자의 마음을 훤히 꿰고 계셨다. 곧 이어 자기가 가는 방법을 찾아보겠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시카고 인근에 있는 여러 기독교 대학들을 수소문해서 쥬빌리 선교대회에 참석하는 학생팀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밴에 여유 좌석이 있는지를 알아보시고 함께 갈 수 있도록 주선하셨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성실하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처럼 이메일이 발달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전화요금이 거의 무료에 가까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국제 전화요금이 비쌌던 시절에, 그것도 한국에서 멀리 미국에 있는 기독교대학들을 접촉하셔서(참고로 위튼대학이 있는 미국 중서부 지역은 선교사님의 연고지도 아니었다) 쥬빌리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팀을 찾아내고, 그 팀이 몰고 가는 차에 자리가 있는지를 확인하시고, 필자가 함께 갈 수 있도록 주선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놀라운 열정이었다. 선교사님으로 인해 폭설이 내리는 영하의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영어도 잘 못하는 한국 남자가 말(馬)만한 미국 여대생들 속에 보릿자루처럼 끼어 앉아 밤새도록 피츠버그까지 달려간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피츠버그에 도착한 후 필자는 선교사님과 같은 호텔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선교사님은 이전에도 대구에 있는 우리 집에 오셔서 주무신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국내도 아닌, 해외에서, 하루도 아닌 수일을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선교대회 강사들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필자에게 선교사님은 미국과 캐나다에 계시는 여러 기독학자들을 소개해 주셨고, 몇몇 한국인 학자들도 만나도록 주선해 주셨다. 그 때 만났던 북미주 학자들 중에는 필자가 글을 통해 감동을 받았던 캐나다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나 칼빈 대학, 도르트 대학 등 주로 개혁주의 학교에 계신 분들이 여럿 있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필자는 선교사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도전받았지만 피츠버그에서 함께 지낸 며칠 동안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저녁에 호텔 방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선교사님은 별도의 잠옷을 챙겨 오지 않으셨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아래는 팬티를 입으시고 위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데 선교사님이 입고 계시는 러닝셔츠에 큼직한 구멍이 몇 개 숭숭 뚫려 있는 게 아닌가! 2월 하순이라 시원하라고 일부로 뚫어놓은 “패션” 셔츠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구멍들의 크기나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당시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주한미군 민간 기술자로, 그리고 전주 예수병원 하수처리 기술자로 근무하고 계셨기 때문에 적지 않은 연봉을 받고 계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헐은 속옷을 입고 다니실까? 가족도 없는 분이 월급은 받아서 다 어디에 쓰셨는지... 필자 역시 옷차림에 별 관심이 없는 것 때문에 늘 아내로부터 핀잔을 받고 있는 처지였지만 선교사님은 필자와도 비교할 수가 없는 분이었다. 그러고 나서 자세히 보니 속옷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교사님이 들고 다니는 가방도, 구두도 모두 나이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선교대회 기간 중 수일간을 선교사님과 같은 방에서 지나면서 필자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가시는 기독도의 모습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다. 당시 국립대 조교수 3년차였던 필자의 월급이 1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연봉 1만불 내외) 선교사님은 이의 몇 배에 달하는 고액의 연봉을 받고 계셨다. 그런 선교사님이 다 떨어진 러닝셔츠에 낡아빠진 구두를 신으시고 허름한 가방을 들고 외판원처럼 한국 학생들과 학자들을 20년 이상(1980년대 중반 기준) 찾아다니셨다. 그리고 자신의 월급을 털어 수많은 젊은 학자들을 깨우치는 문서 사역을 하신 것이다. 선교사님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소명에 진력하는 충성된 나그네이셨다. 선교사님의 모습을 통해 필자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바로 나그네와 행인임을 알게 되었다.

5. 씨뿌리는 사람

선교사님을 통해 필자가 “소책자 회심”을 경험한지도 어언 30여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선교사님은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어떤 분보다 필자의 삶과 사역에 직,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셨다. 우선 1990년부터 2년간, 물리학계에서 멀쩡하게 잘 나가던 사람이 아예 학교를 휴직하고 미국에서 대학원 학생으로 과학사와 신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에도 선교사님의 영향이 컸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미처 몰랐지만 이 인문학 훈련은 필자의 후반기 사역이었던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사역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VIEW 사역으로 인해 필자는 1997년, 국내에서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경북대를 사직하고 밴쿠버로 떠났다. 그러므로 결국 필자를 안정된 직장에서 “쫓아내어” 나그네와 행인의 삶을 떠나도록 등을 떠민 분이 바로 선교사님이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필자가 창조과학의 과학적 문제는 물론 성경적, 신학적 문제를 깨닫게 된 데도 선교사님의 영향이 컸다. 사실 선교사님은 처음부터 한국창조과학회 설립을 열심히 도왔던 분이었다. 선교사님은 일반인들이 구하기 어려웠던 좋은 창조과학 문헌들을 미국에서 직수입하셔서 창조과학회 임원들에게 보급하시는 등 수고를 많이 하셨다. 아마 처음에는 선교사님도 창조과학의 문제를 잘 깨닫지 못하신 듯 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선교사님은 창조과학이 과학적으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나 성경해석학적으로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하셨다. 아마 미국 창조과학 운동의 모습을 보면서 일찌감치 창조과학의 문제를 간파하신 듯 했다. 물론 선교사님의 지적으로 곧 바로 필자가 창조과학에 대한 견해를 바꾼 것은 아니다. 그 사이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 대학원에서 과학사(창조과학사)와 신학을 공부하면서 창조과학의 문제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창조과학의 전투적 특성과 선명성에 매료되어 있었던 필자가 창조과학의 틀을 과감하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선교사님은 채근하지 않으시고 늘 그러하셨던 기다리셨다. 선교사님은 필자에게 복음주의 진영의 전문 학자들의 문헌들을 꾸준히 소개해 줌으로써 더디지만 필자가 창조과학의 문제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선교사님을 통해 필자는 창조론 분야에 지금은 전설이 된 창조과학자 모리스(Henry M. Morris)나 기쉬(Duane T. Gish) 등의 글만이 아니라 지질학자 영(Davis Young), 물리학자 밴틸(Howard J. van Till), 천문학자 로스(Hugh Ross) 등 복음주의 진영의 지도적 과학자들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선교사님의 인내와 성실로 인해 원래 성격이 “창조과학적인” 필자는 20여년이 지난 후에 창조과학의 덫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선교사님이 아니었더라면 필자는 지금도 6천년 창조연대를 운운하면서 돈키호테처럼 전투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교사님은 분명히 학자는 아니셨다. 그렇다고 교육자도 아니셨다. 선교사님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선교사님은 인내와 겸손으로 씨를 뿌리는 분이셨다. 선교사님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적으로 생각하도록 격려하셨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선교사님의 관심은 기독교적 학문에서 기독교적 교육으로 조금 바뀌셨지만 사람들에게 도전하는 질문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셨고, 때로는 좀 공격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노라면 선교사님은 자연스럽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문헌을 제공하셨다. 그런 방법으로 선교사님은 그리스도인 학자들을 엮으시고, 만나게 하시고,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하셨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선교사님은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선교사님의 사역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필자나 주변 사람들은 원 선교사님을 선교사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분은 어느 교단이나 교회, 선교단체로부터 파송 받은 “정식” 선교사도 아니다. 아무도 선교사로 가라는 이가 없었지만 대학을 졸업하신 후에 스스로 이 사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스스로 선교사라고 하면서 한국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님은 한국에 오셔서 전통적인 선교사들이 하는 교회개척이나 기관사역을 하신 것도 아니다. 스스로 직장생활을 해서 “선교비”를 충당하셨고, 가끔 스스로 안식년이라고 하면서 미국에 1년씩 다녀오셨다. 그러니 성역 50주년 운운하며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은퇴하실 필요도 없고, 은퇴하라고 강요할 사람도 없다. 선교사님의 삶을 생각할 때면 필자는 1953년,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Jean Giono)가 발표한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글을 떠올리곤 한다. 그 글에서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Elzéard Bouffier)는 한 평생 눈에 보이는 나무 씨앗을 심었지만 선교사님은 한평생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의 씨앗을 심으셨다. 부피에와 같이 선교사님은 자신이 뿌린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거둘 거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 않으시고 그냥 묵묵히 어제도, 오늘도 씨를 뿌리고 계신다. 아마 세상 떠나실 때까지 그렇게 사실 것이다. 이제 선교사님의 뿌린 씨앗이 부분적으로 싹이 트고 자라서 약간의 열매가 눈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선교사님이 뿌린 씨앗은 어쩌면 선교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아니 그리고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본격적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제 선교사님은 팔십을 지나고 계시고 필자를 포함해서 1980년대 초반, 한국에서 선교사님의 성화에 떠밀려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학문 운동을 시작했던 1세대들은 대부분 육십을 지나고 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노라면 선교사님과 더불어 지냈던 세월보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문과 교육의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주권을 꿈꿨던 많은 선배들, 동료들, 후배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필자는 그 한 가운데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셨던 원이삼 선교사님이 계실 것을 확신한다. 

-끝-



1) 이 글은 원이삼 선교사님 팔순 기념도서 출간을 위해 IVP에 기고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2) 필자는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과 쥬빌리채플을 섬기고 있다.

3) Hendrik Van Riessen, <The Christian Approach to Science> (Hamilton, ON: Association for Reformed

Scientific Studies, 1966).

4) http://www.vebidoo.com/hendrik+van+riessen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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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 Team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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